우리집에는 웬수같은 짐승이 산다.
*우리집에는 웬수같은 짐승새끼가 산다.
***
기말고사와 레포트로 바쁘던 학기말이 끝나간다. 재학생 대부분의 시험이 끝나는 주의 금요일이 되자 기숙사 입구쪽 도로에는 임시 주차해놓은 차들이 트렁크를 열고선 늘어서 있었다. 1층 로비는 짐을 든 사람들로 분주했다. 휴게실의 비어있는 탁자나 복도의 의자마다 흩어져있는 학생들은 하나같이 땀을 뻘뻘 흘리며 집으로 보낼 짐더미와 씨름중이다. 택배 상자를 실은 손수레와 캐리어의 바퀴 소리, 박스테이프 뜯는 소리, 어떻게든 짐을 줄이려는 기숙사생들의 앓는소리로 가득찼다.
늦어진 시험시간에 점심을 거르다시피 하고선 기숙사로 돌아왔더니 난장판이 따로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이른 저녁이라도 먹고 올 걸. 동아리방에 들르면서 사들고 온 편의점 비닐봉지를 품에 안고 로비에 혼잡하게 세워진 짐더미들을 피해 계단을 향했다. 교외로 신축한다고 떠들던 기숙사는 인근 주민들의 원성에 몇 년째 첫 삽도 뜨지 못해 올해도 누구하나 예외없이 계단을 오가야 했다.
“엇, 주님이다. 넌 칩에 안 가?”
“선배까지 주님이라고 부르기에요? 아직 교양 시험이 남아서요.”
틈틈이 넓혀둔 선배들과의 인맥으로 신청했던 교양과목은 한 학기 내내 꿀을 빨 수 있어서 방심했다. 기말고사 역시 사전에 공지한대로 첫 시험일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뜻밖에 교수님의 일정이 꼬이면서 한 주가 미뤄지자 예정되었던 귀향일이 사흘이나 밀렸다.
“너도 그거 듣니? 매년 꿀강의라더니 이번엔 시험 밀려서 지뢰라며.”
“안그래도 틈틈이 짐 다 싸놨다가 급하게 캐리어 하나 풀었어요.”
“재수도 없다. 안 됐네, 나는 오늘 가는데.”
선배도 기말고사에 접어들며 발표와 시험이 연달아 겹쳤다며 울상이었지. 결과야 어찌됐든 시험이 끝나자 살아난 모양이다. 거기다 3일간 시험기간이라기에는 한가하고 그렇다고 방학도 아닌 어중간한 후배까지 있으니 오죽할까. 위로하는 척 놀리고 싶어하는 모습에 손사래를 쳤다.
“아, 예. 그럼 후배는 이만 물러갈테니 가시는 길까지 편안히 가세요.”
“말투가 왜 그래. 나를 어디까지 보내려고.”
“남의 불행을 비웃으니까 그렇게 들리죠. 그럼 나중에 봐요.”
좁은 계단 사이로 상자를 이고 지는 일개미들을 피해 기숙사방에 도착했다. 룸메는 아직 안 왔는지 인기척이 없는 방안은 캄캄하다. 얘는 그렇게 잔소리를 해도 듣지를 않는다니까. 커튼을 걷자 천자락 사이로 기웃거리던 노을이 문지방까지 쭉 다리를 뻗는다. 그제서야 난장판이 된 방 안이 눈에 들어온다. 택배대란에 대비해 미리 보내거나 정리해 둔 내 짐과 달리 룸메의 짐은 애초에 별거 없던 그대로 그 자리에 흩어져있다.
그러니까 방이 이 모양이지. 남들이 가장 바쁠시기에 혼자 느긋하게 구는 룸메는 오늘 아침도 늦잠이었는지 기어나온 그대로 이불과 옷가지가 널부러져 있었다. 침대에서 흘러내린 이불을 주워 다시 위로 올린다. 한동안 쓰지 않은 침대의 2층에는 인형이 없어지고 이불이 걷어져 생활감이라곤 남아있지 않았다. 한 학기 동안 한 번 밖에 빨지 않았던 이불은 우리의 관계가 조금은 달라진 이후로 니것 내것 번갈아가며 섬유유연제 냄새가 떠나질 않았다.
어르고 달래서 수건을 깔면 뭐해. 결국은 지 하고싶은 거 다 하다가 더러워져서 세탁실에 출근도장 찍고 있는 걸. 한숨을 푹 쉬며 이불을 개자 한 가운데 남아있는 거무스름한 얼룩이 눈에 들어온다. 그만 알아보자. 나는 아무것도 못 봤어. 갠 이불을 다시 펼쳐 그 자리에 덮었다.
그나저나 상자를 풀어야 돼 말아야 돼. 날도 더운데 돌려입을 수도 없고. 뜻밖에 여유가 생긴 3일동안 입을 옷은 캐리어에 들어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시험기간 전, 발등에 불이 떨어져 동기들과 도서관에 갔다가 한참 놀고싶어하는 애들과 있으니 집중이 되지 않아 룸메를 핑계로 일찍 들어왔다. 그러면 뭐해 나도 놀고 싶어하는 앤데. 어차피 놀거면 유익한 걸 하자는 생각에 일찌감찌 짐정리를 시작했다.
무게와 용도에 따라 상자를 하나하나 분류하고 담고 있으니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서 졸업선배들이랑 친선경기를 한다던 룸메가 돌아왔다. 공으로 얼마나 얻어맞은건지 드러난 팔다리가 새빨갛게 익어서는 손가락에는 덕지덕지 붙은 테이핑자국이 끈적거린다. 씻고 와. 씻고 온 거야. 씻고 왔는데 이런다고? 평소처럼 티격태격하고 있으니 룸메가 방에 널부러진 짐들에 관심을 보인다.
“이 스냅백은 내가 사준건데. 너 쓰고 다니는 걸 못 봤다?”
“사람이 필요한 걸 사주던가. 그리고 누가 디자인 똑같은 걸로 사래?”
“1+1이었다고. 1개 가격에 두개면 남는 장사 아니야?”
“그러면 니가 두개 다 쓰던지. 왜 안 쓰는데 주는 거야?”
“쓰고 다닐 줄 알았지.”
“니가 맨날 쓰고다니는데 어떻게 쓰고 다녀?”
그리고 놀랍게도 문제의 스냅백은 시험기간이 되자마자 귀신같이 쓰고 다니게 되었다.
“저건 뭐야. 썬크림? 얼마 안 남았는데 버리고 가.”
“안 그래도 이번 여름까지만 쓸 거거든.”
“너 비비바른다고 잘 안쓰잖아. 나처럼 자주 쓰는 것도 아니고.”
“있으면 바르긴 하지. 왜, 니거 다 썼어? 줄까?”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안 쓸거면 아깝잖아.”
그러면서 뭘 그렇게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니. 미어캣처럼 서서는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퍽이나 우스워 고개를 끄덕이자 잽싸게 가방에 집어 넣는다. 그게 좀 가성비가 좋지. 끈적거리는 걸 싫어하는 건 나나 룸메나 비슷해서 가끔 바르고 나가려고 하면 은근슬쩍 손등을 내밀고 있었다. 그러면서 서툴기는 엄청 서툴러서 늘 하얗게 뜨게 바르니 손이 안 갈 수가 없다.
그렇게 정리한 짐들이 상자로 두 개, 아직은 비어있는 이불 상자 하나, 캐리어에 백팩 하나로 추려졌다. 상자 두개를 택배로 보내는 동안 심기가 불편하던 룸메는 뭐가 필요하니 빌려달라는 둥 내 짐을 헤쳐놓곤 했다. 오늘도 역시나, 들어오기 무섭게 지퍼가 벌어져 있는 백팩에 한숨을 쉬며 들여다보니 바디로션이 나와있다. 그래 그냥 너 써라. 룸메의 책상에 올려져 있는 스포츠 백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룸메의 짐은 항상 이 가방 하나 뿐이었지.
룸메가 처음 기숙사에 배정받았을 때 들고온거라곤 망치가방이라 불리는 커다란 스포츠 백 하나와 나중에 사들고 온 이불이 전부였다. 굉장히 미니멀한 생활을 좋아하나보네. 어림짐작을 하던 것도 잠시 룸메나 나나 낯을 가리는 성격도 아니라 말을 트기 무섭게 친해졌다. 신입생에 학기 초니 기숙사에는 막차시간이 되어서야 들어와 눈붙이고 옷만 갈아입는 날이 더 많았지.
그렇게 인사를 나눈뒤로 놀자리만 찾아다니다 간만에 일찍 들어온 날이었다. 다리가 길어 슬픈 짐승인 룸메는 일찌감찌 침대의 1층을 차지한 지 오래였고 그날도 들어오자마자 이불과 하나가 되어 널부러져있었다. 선배들의 술받이 무녀노릇을 하느라 반쯤 기절해 있던 룸메는 내가 들어오고서도 한참을 골골거렸다. 저렇게 힘들어하는데 그냥 둬야하나 고민하다 속 차릴 겸 밥이라도 먹으러 가자는 말에 갑자기 뛰쳐나가더니 치킨을 사왔다.
“너 숙취는 어쩌고?”
“해장엔 치킨이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어이가 없어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러거나 말거나 포장을 열심히 뜯는다. 얘 좀 이상한 것 같아. 아니야, 느끼한 걸 좋아할 수도 있지.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으니까 이런 애도 있는 거 아니겠어.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얌전히 치킨무를 뜯어오자 닭이 두마리로 늘어나 있었다.
“근데 왜 두마리야?”
“1인 1닭이잖아.”
“후라이드랑 양념 하나씩인데?”
“반반을 두개 시킬 순 없으니까.”
무슨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반응을 보이며 숨쉬듯이 한마리를 다 먹어치우고선 부족했는지 내가 남긴 치킨을 뜯어 밥까지 비벼먹는다. 그래 사주는건데 주는대로 잘 먹어야지. 잘 먹는 사람이랑 먹으면 많이 먹게 된다는 속설대로 과식을 해버리고선 금세 지쳐나가 떨어졌다. 새삼 운동하는 애들의 위장에 놀라며 구경에 심취해 있자 양념까지 싹싹 긁어먹던 룸메는 플라스틱 수저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더니 슥 내민다.
“자, 먹어.”
“아냐, 너 먹어.”
“넌 좀 먹어야 되겠는데?”
“지금은 더 못 먹어. 마음만 받을게.”
대뜸 가까이 앉더니 멋대로 내 팔을 주물거리고선 체지방도 적고 이렇다 할 근육 하나 없는 헐벗은 몸이라는 평을 내렸다. 헐벗은 몸이라니. 그래도 나름 나올 데 나오고 들어갈 데 들어간 몸이고 깡마른 것도 아닌데 왜. 억울해서 항변을 늘어놓는 입에 치밥이 담긴 수저가 밀려들어온다. 맛있는 건 공유하고 싶은 마음 알겠는데 나는 지금 배가 아주 많이 부르다니까. 이상한데서 고집을 부리는 룸메와의 생활은 그 후로도 의외의 부분에서 충돌했다.
언제라도 전지훈련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망치가방에는 뭐가 들어있기는 한 건지 소모품을 제외한 생활용품은 내 걸 빌려쓰는 게 다반사였다. 적어도 쓰면 제자리에라도 갖다두라니까. 어김없이 따라오는 잔소리에 입술이 잔뜩 튀어나오더니 어느 날은 다X소라도 털었는지 왕창 사서 침대에 뿌려놨었지.
“니가 무슨 돈이 있어 운동한다고 알바도 안 벌면서.”
“저번달에 도 대회나가서 상금 받은거 남았거든? 너보다는 부자니까 신경 꺼라.”
“신발 밑창 다 닳아서 새거 산다며. 그거 비싸지 않아?”
“그건 이번 대회에서 벌어서 살거야.”
거기다 돈을 맡겨놨니. 그 후로도 무슨 돈만 생기면 놀자고 이리저리 끌고다녔지. 학생이 무슨 돈이 있어서 이렇게 펑펑쓴담. 사서 걱정한 건 나였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거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자의 짐을 헤쳐놓고 있었다. 이미 펼져놓은 거 하는 수 없지. 옷가지를 꺼내고선 다시 상자를 정리했다.
어느덧 자리를 잡고있던 노을이 걷힌 자리엔 땅거미가 내려앉아 제법 음침해졌다. 오늘이 마지막 시험기간일텐데 좀처럼 룸메도 돌아오질 않는다. 시험 끝난다고 놀러라도 갔나. 메신저를 확인하자 점심시간에 식사를 건너뛴 나의 스트레스에 샌드백이 되어있던 그대로다. 읽기는 한 것 같은데. 늦으면 얘길하지. 괜히 심술이 나서 먼저 먹어버리겠다고 소중히 들고왔던 편의점 봉지를 펼쳤지만 아까 전처럼 식욕은 돌지 않았다. 샌드위치와 우유를 바닥에 내려놓고 침대에 몸을 기댔다.
***
달칵!
잠깐 잠이 들었나. 이미 캄캄해진 방에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선 선잠에서 깨어났다. 컴컴한 방 안에 눈이 적응을 할 때 쯤. 불을 켜려 일으키던 몸이 그대로 번쩍 들려 침대 위로 올려졌다. 너무 놀라면 비명도 안 나온다고 하지. 온 몸에 힘을 주고선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겁을 집어먹자 불청객은 내려놓은 그대로 꼭 안아온다.
“깼어? 아깝다 그냥 내버려 둘 걸.”
“까.. 깜짝이야. 왔으면 말을 해.”
씨익 웃으며 땀에 젖어든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겨주더니 이마에 입술을 가져온다.
“다녀왔어.”
“뭐 하다가 이제 와. 연락도 안하고.”
“그러게. 이렇게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기다릴 줄 알았으면 일찍 올 걸 그랬다.”
“그냥 짐 정리하다가 피곤해서 존 거거든?”
“에이, 니가 나야? 멀쩡한 짐을 다시 정리하게?”
어쭈, 당당한 것 봐. 이러려고 나 짐싼다고 삐져가지고 요 며칠 간 궁시렁거리고 심술부렸니. 뻔뻔하게 굴던 룸메는 시험이 끝난 덕분인지 기분이 좋아보인다. 마치 술이라도 한 잔 한 것처럼 들떠가지고선 재잘재잘 일상을 늘어놓는다. 차라리 실기를 하지 이론 시험은 너무 외울 게 많다느니. 교수님이 문제를 꼬아서 마지막까지 애먹었다느니 메신저로 했어야 할 얘기들을 MSG섞어가며 떠드니 오해는 풀린지 오래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아직 나 화났어. 입을 꾹 다물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데 뭐가 그렇게 좋은건지. 할 말이 많은 와중에도 뾰로통한 입술을 쪽쪽거리고 괜히 잘 넘어간 머리를 쓰다듬고 밀어내는 팔을 다시 감아온다. 그래도 팔을 걷어내고 아예 팔짱을 껴 버리자 룸메는 옆에 눕더니 커다란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마주본다.
“사실은 시험 끝나고 잠시 교외에 갔다 왔어.”
“뒷풀이하러? 어차피 너네 과 동기들도 한 다리 건너 아는 애들인데 왜 연락 안 했어.”
“아니, 이거 계약하고 오느라.”
“이게 뭔데?”
언제 꺼내 둔 건지 바닥에서 주워든 종이를 건네주더니 휴대폰으로 내용을 비춰준다.
“원룸 임대차 계약서.. 너 방 얻었어?”
“으흠! 나 대회나가고 훈련하고 그러면 체육관에 있는 시간도 늘어나고 남들이랑 생활패턴이 달라서 기숙사 생활하기 힘들어. 너도 기숙사 좁고 더운데 계단 오르락내리락 하기힘들다고 불만 많았잖아. 기숙사는 다시 배정받으면 같은 방 못 쓸 수도 있는데 다른 애랑 자는 꼴은 못 보겠고..”
“야.. 무슨!”
구구절절 맞는 말이긴 한데 말이 좀 그렇다. 그러니까 우리 짐승새끼가 말하고 싶은 뜻은..
“그러니까 나랑 살래?”
동거하자는 거잖아. 깨닫기도 전에 두 볼이 확 달아올랐다. 아니, 누가 너랑 같이 살아준대? 물어보지도 않고 방부터 계약하면 어쩌자는 거야. 지 방에 내가 얹혀살고 그러면 좋아할까봐? CC끼리 하지 말라고 추천하는 베스트 5위에 들면서도 동시에 CC끼리 가장 하고 싶어하는 베스트 1위를 그렇게 제안하고 그러면. 어? 그러면..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면 나보고 어떡하라고. 들뜨면서도 복잡해진 머리에 괜히 네 볼만 만지작 거린다.
“부담되면 그냥 짐 창고라고 생각하고 옮겨놔도 돼. 데이트 할 시간 없으면 그냥 얼굴 보고, 밥 한끼 같이 먹고, 손만 잡고 잘 수도 있으니까.”
“퍽이나.”
“그래. 사실 방금 한 말은 거짓말이야.”
그럴 줄 알았지. 퍽이나 니가 손만 잡고 자자고 하겠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말라고 했던 날. 칼을 갈던 리벤지는 짐승새끼의 순순한 협조 끝에 속옷만 남겨둔 위에 올라타 면으로 된 천조각과 조금은 거칠어진 피부 아래 숨겨진 근육들을 느긋하게 쓰다듬을 수 있었다. 상등품의 고기를 고르듯 부위에 따라 그 질감과 변화하는 형태를 하나하나 음미하며 쇄골부터 발가락 사이까지 빈틈없이 즐겼지.
“그래도 부담가지라고 한 말은 아니야. 아니다, 부담 가져. 나는 네가 다른 년이랑 자는 꼴 못 봐.”
“아니,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른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바람피고 그러면 누가 너 쉴드 쳐 줄줄 알아? 공개적으로 망신 줄 거야. 신방과 18학번 퀸카 내 여친이랑 바람핀 새끼 나와!”
“미친년아! 지금 10시 넘었어. 조용히 안 해?”
“그러니까 나랑 살자 그냥.”
짐승새끼의 가죽처럼 두꺼워진 굳은 살과 그 사이 미처 여물지 못한 여린 살에 여자라면 누구라도 부끄럽지 않아 할 수 없는 민감한 부위들까지 관찰했다. 그 위에서 춤을 추던 손가락이 마침내 너와 연결되는 순간. 느긋한 전희가 이어지는 동안 몰이를 당하는 토끼처럼 덜덜 떨던 짐승새끼가 이성을 잃고 여우처럼 요염하게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며 앙앙거리던 모습을 떠올리니 괜히 손목이 시큰해졌다.
“나 아니면 누가 너 챙겨주겠어.”
“어?”
욕망에 눈이 멀어 가볍게 시작한 관계는
“살자고. 너랑 나랑.”
아무래도 코를 단단히 꿰인 것 같다.
“그런데 상자에 샤워기 헤드는 왜 넣었냐?”
기숙사라는 보금자리를 벗어나기로 한 지금.
“아, 그게.. 만약에 나랑 안 산다 그러면 너 밤에 외로울까봐.”
“같이 산다는 말 취소야”
“아니! 무슨 사람이 그렇게 가볍냐? 그럴수록 나랑 살아야지!”
우리집에는 웬수같은 짐승새끼가 산다.
***
기말고사와 레포트로 바쁘던 학기말이 끝나간다. 재학생 대부분의 시험이 끝나는 주의 금요일이 되자 기숙사 입구쪽 도로에는 임시 주차해놓은 차들이 트렁크를 열고선 늘어서 있었다. 1층 로비는 짐을 든 사람들로 분주했다. 휴게실의 비어있는 탁자나 복도의 의자마다 흩어져있는 학생들은 하나같이 땀을 뻘뻘 흘리며 집으로 보낼 짐더미와 씨름중이다. 택배 상자를 실은 손수레와 캐리어의 바퀴 소리, 박스테이프 뜯는 소리, 어떻게든 짐을 줄이려는 기숙사생들의 앓는소리로 가득찼다.
늦어진 시험시간에 점심을 거르다시피 하고선 기숙사로 돌아왔더니 난장판이 따로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이른 저녁이라도 먹고 올 걸. 동아리방에 들르면서 사들고 온 편의점 비닐봉지를 품에 안고 로비에 혼잡하게 세워진 짐더미들을 피해 계단을 향했다. 교외로 신축한다고 떠들던 기숙사는 인근 주민들의 원성에 몇 년째 첫 삽도 뜨지 못해 올해도 누구하나 예외없이 계단을 오가야 했다.
“엇, 주님이다. 넌 칩에 안 가?”
“선배까지 주님이라고 부르기에요? 아직 교양 시험이 남아서요.”
틈틈이 넓혀둔 선배들과의 인맥으로 신청했던 교양과목은 한 학기 내내 꿀을 빨 수 있어서 방심했다. 기말고사 역시 사전에 공지한대로 첫 시험일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뜻밖에 교수님의 일정이 꼬이면서 한 주가 미뤄지자 예정되었던 귀향일이 사흘이나 밀렸다.
“너도 그거 듣니? 매년 꿀강의라더니 이번엔 시험 밀려서 지뢰라며.”
“안그래도 틈틈이 짐 다 싸놨다가 급하게 캐리어 하나 풀었어요.”
“재수도 없다. 안 됐네, 나는 오늘 가는데.”
선배도 기말고사에 접어들며 발표와 시험이 연달아 겹쳤다며 울상이었지. 결과야 어찌됐든 시험이 끝나자 살아난 모양이다. 거기다 3일간 시험기간이라기에는 한가하고 그렇다고 방학도 아닌 어중간한 후배까지 있으니 오죽할까. 위로하는 척 놀리고 싶어하는 모습에 손사래를 쳤다.
“아, 예. 그럼 후배는 이만 물러갈테니 가시는 길까지 편안히 가세요.”
“말투가 왜 그래. 나를 어디까지 보내려고.”
“남의 불행을 비웃으니까 그렇게 들리죠. 그럼 나중에 봐요.”
좁은 계단 사이로 상자를 이고 지는 일개미들을 피해 기숙사방에 도착했다. 룸메는 아직 안 왔는지 인기척이 없는 방안은 캄캄하다. 얘는 그렇게 잔소리를 해도 듣지를 않는다니까. 커튼을 걷자 천자락 사이로 기웃거리던 노을이 문지방까지 쭉 다리를 뻗는다. 그제서야 난장판이 된 방 안이 눈에 들어온다. 택배대란에 대비해 미리 보내거나 정리해 둔 내 짐과 달리 룸메의 짐은 애초에 별거 없던 그대로 그 자리에 흩어져있다.
그러니까 방이 이 모양이지. 남들이 가장 바쁠시기에 혼자 느긋하게 구는 룸메는 오늘 아침도 늦잠이었는지 기어나온 그대로 이불과 옷가지가 널부러져 있었다. 침대에서 흘러내린 이불을 주워 다시 위로 올린다. 한동안 쓰지 않은 침대의 2층에는 인형이 없어지고 이불이 걷어져 생활감이라곤 남아있지 않았다. 한 학기 동안 한 번 밖에 빨지 않았던 이불은 우리의 관계가 조금은 달라진 이후로 니것 내것 번갈아가며 섬유유연제 냄새가 떠나질 않았다.
어르고 달래서 수건을 깔면 뭐해. 결국은 지 하고싶은 거 다 하다가 더러워져서 세탁실에 출근도장 찍고 있는 걸. 한숨을 푹 쉬며 이불을 개자 한 가운데 남아있는 거무스름한 얼룩이 눈에 들어온다. 그만 알아보자. 나는 아무것도 못 봤어. 갠 이불을 다시 펼쳐 그 자리에 덮었다.
그나저나 상자를 풀어야 돼 말아야 돼. 날도 더운데 돌려입을 수도 없고. 뜻밖에 여유가 생긴 3일동안 입을 옷은 캐리어에 들어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시험기간 전, 발등에 불이 떨어져 동기들과 도서관에 갔다가 한참 놀고싶어하는 애들과 있으니 집중이 되지 않아 룸메를 핑계로 일찍 들어왔다. 그러면 뭐해 나도 놀고 싶어하는 앤데. 어차피 놀거면 유익한 걸 하자는 생각에 일찌감찌 짐정리를 시작했다.
무게와 용도에 따라 상자를 하나하나 분류하고 담고 있으니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서 졸업선배들이랑 친선경기를 한다던 룸메가 돌아왔다. 공으로 얼마나 얻어맞은건지 드러난 팔다리가 새빨갛게 익어서는 손가락에는 덕지덕지 붙은 테이핑자국이 끈적거린다. 씻고 와. 씻고 온 거야. 씻고 왔는데 이런다고? 평소처럼 티격태격하고 있으니 룸메가 방에 널부러진 짐들에 관심을 보인다.
“이 스냅백은 내가 사준건데. 너 쓰고 다니는 걸 못 봤다?”
“사람이 필요한 걸 사주던가. 그리고 누가 디자인 똑같은 걸로 사래?”
“1+1이었다고. 1개 가격에 두개면 남는 장사 아니야?”
“그러면 니가 두개 다 쓰던지. 왜 안 쓰는데 주는 거야?”
“쓰고 다닐 줄 알았지.”
“니가 맨날 쓰고다니는데 어떻게 쓰고 다녀?”
그리고 놀랍게도 문제의 스냅백은 시험기간이 되자마자 귀신같이 쓰고 다니게 되었다.
“저건 뭐야. 썬크림? 얼마 안 남았는데 버리고 가.”
“안 그래도 이번 여름까지만 쓸 거거든.”
“너 비비바른다고 잘 안쓰잖아. 나처럼 자주 쓰는 것도 아니고.”
“있으면 바르긴 하지. 왜, 니거 다 썼어? 줄까?”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안 쓸거면 아깝잖아.”
그러면서 뭘 그렇게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니. 미어캣처럼 서서는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퍽이나 우스워 고개를 끄덕이자 잽싸게 가방에 집어 넣는다. 그게 좀 가성비가 좋지. 끈적거리는 걸 싫어하는 건 나나 룸메나 비슷해서 가끔 바르고 나가려고 하면 은근슬쩍 손등을 내밀고 있었다. 그러면서 서툴기는 엄청 서툴러서 늘 하얗게 뜨게 바르니 손이 안 갈 수가 없다.
그렇게 정리한 짐들이 상자로 두 개, 아직은 비어있는 이불 상자 하나, 캐리어에 백팩 하나로 추려졌다. 상자 두개를 택배로 보내는 동안 심기가 불편하던 룸메는 뭐가 필요하니 빌려달라는 둥 내 짐을 헤쳐놓곤 했다. 오늘도 역시나, 들어오기 무섭게 지퍼가 벌어져 있는 백팩에 한숨을 쉬며 들여다보니 바디로션이 나와있다. 그래 그냥 너 써라. 룸메의 책상에 올려져 있는 스포츠 백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룸메의 짐은 항상 이 가방 하나 뿐이었지.
룸메가 처음 기숙사에 배정받았을 때 들고온거라곤 망치가방이라 불리는 커다란 스포츠 백 하나와 나중에 사들고 온 이불이 전부였다. 굉장히 미니멀한 생활을 좋아하나보네. 어림짐작을 하던 것도 잠시 룸메나 나나 낯을 가리는 성격도 아니라 말을 트기 무섭게 친해졌다. 신입생에 학기 초니 기숙사에는 막차시간이 되어서야 들어와 눈붙이고 옷만 갈아입는 날이 더 많았지.
그렇게 인사를 나눈뒤로 놀자리만 찾아다니다 간만에 일찍 들어온 날이었다. 다리가 길어 슬픈 짐승인 룸메는 일찌감찌 침대의 1층을 차지한 지 오래였고 그날도 들어오자마자 이불과 하나가 되어 널부러져있었다. 선배들의 술받이 무녀노릇을 하느라 반쯤 기절해 있던 룸메는 내가 들어오고서도 한참을 골골거렸다. 저렇게 힘들어하는데 그냥 둬야하나 고민하다 속 차릴 겸 밥이라도 먹으러 가자는 말에 갑자기 뛰쳐나가더니 치킨을 사왔다.
“너 숙취는 어쩌고?”
“해장엔 치킨이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어이가 없어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러거나 말거나 포장을 열심히 뜯는다. 얘 좀 이상한 것 같아. 아니야, 느끼한 걸 좋아할 수도 있지.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으니까 이런 애도 있는 거 아니겠어.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얌전히 치킨무를 뜯어오자 닭이 두마리로 늘어나 있었다.
“근데 왜 두마리야?”
“1인 1닭이잖아.”
“후라이드랑 양념 하나씩인데?”
“반반을 두개 시킬 순 없으니까.”
무슨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반응을 보이며 숨쉬듯이 한마리를 다 먹어치우고선 부족했는지 내가 남긴 치킨을 뜯어 밥까지 비벼먹는다. 그래 사주는건데 주는대로 잘 먹어야지. 잘 먹는 사람이랑 먹으면 많이 먹게 된다는 속설대로 과식을 해버리고선 금세 지쳐나가 떨어졌다. 새삼 운동하는 애들의 위장에 놀라며 구경에 심취해 있자 양념까지 싹싹 긁어먹던 룸메는 플라스틱 수저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더니 슥 내민다.
“자, 먹어.”
“아냐, 너 먹어.”
“넌 좀 먹어야 되겠는데?”
“지금은 더 못 먹어. 마음만 받을게.”
대뜸 가까이 앉더니 멋대로 내 팔을 주물거리고선 체지방도 적고 이렇다 할 근육 하나 없는 헐벗은 몸이라는 평을 내렸다. 헐벗은 몸이라니. 그래도 나름 나올 데 나오고 들어갈 데 들어간 몸이고 깡마른 것도 아닌데 왜. 억울해서 항변을 늘어놓는 입에 치밥이 담긴 수저가 밀려들어온다. 맛있는 건 공유하고 싶은 마음 알겠는데 나는 지금 배가 아주 많이 부르다니까. 이상한데서 고집을 부리는 룸메와의 생활은 그 후로도 의외의 부분에서 충돌했다.
언제라도 전지훈련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망치가방에는 뭐가 들어있기는 한 건지 소모품을 제외한 생활용품은 내 걸 빌려쓰는 게 다반사였다. 적어도 쓰면 제자리에라도 갖다두라니까. 어김없이 따라오는 잔소리에 입술이 잔뜩 튀어나오더니 어느 날은 다X소라도 털었는지 왕창 사서 침대에 뿌려놨었지.
“니가 무슨 돈이 있어 운동한다고 알바도 안 벌면서.”
“저번달에 도 대회나가서 상금 받은거 남았거든? 너보다는 부자니까 신경 꺼라.”
“신발 밑창 다 닳아서 새거 산다며. 그거 비싸지 않아?”
“그건 이번 대회에서 벌어서 살거야.”
거기다 돈을 맡겨놨니. 그 후로도 무슨 돈만 생기면 놀자고 이리저리 끌고다녔지. 학생이 무슨 돈이 있어서 이렇게 펑펑쓴담. 사서 걱정한 건 나였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거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자의 짐을 헤쳐놓고 있었다. 이미 펼져놓은 거 하는 수 없지. 옷가지를 꺼내고선 다시 상자를 정리했다.
어느덧 자리를 잡고있던 노을이 걷힌 자리엔 땅거미가 내려앉아 제법 음침해졌다. 오늘이 마지막 시험기간일텐데 좀처럼 룸메도 돌아오질 않는다. 시험 끝난다고 놀러라도 갔나. 메신저를 확인하자 점심시간에 식사를 건너뛴 나의 스트레스에 샌드백이 되어있던 그대로다. 읽기는 한 것 같은데. 늦으면 얘길하지. 괜히 심술이 나서 먼저 먹어버리겠다고 소중히 들고왔던 편의점 봉지를 펼쳤지만 아까 전처럼 식욕은 돌지 않았다. 샌드위치와 우유를 바닥에 내려놓고 침대에 몸을 기댔다.
***
달칵!
잠깐 잠이 들었나. 이미 캄캄해진 방에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선 선잠에서 깨어났다. 컴컴한 방 안에 눈이 적응을 할 때 쯤. 불을 켜려 일으키던 몸이 그대로 번쩍 들려 침대 위로 올려졌다. 너무 놀라면 비명도 안 나온다고 하지. 온 몸에 힘을 주고선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겁을 집어먹자 불청객은 내려놓은 그대로 꼭 안아온다.
“깼어? 아깝다 그냥 내버려 둘 걸.”
“까.. 깜짝이야. 왔으면 말을 해.”
씨익 웃으며 땀에 젖어든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겨주더니 이마에 입술을 가져온다.
“다녀왔어.”
“뭐 하다가 이제 와. 연락도 안하고.”
“그러게. 이렇게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기다릴 줄 알았으면 일찍 올 걸 그랬다.”
“그냥 짐 정리하다가 피곤해서 존 거거든?”
“에이, 니가 나야? 멀쩡한 짐을 다시 정리하게?”
어쭈, 당당한 것 봐. 이러려고 나 짐싼다고 삐져가지고 요 며칠 간 궁시렁거리고 심술부렸니. 뻔뻔하게 굴던 룸메는 시험이 끝난 덕분인지 기분이 좋아보인다. 마치 술이라도 한 잔 한 것처럼 들떠가지고선 재잘재잘 일상을 늘어놓는다. 차라리 실기를 하지 이론 시험은 너무 외울 게 많다느니. 교수님이 문제를 꼬아서 마지막까지 애먹었다느니 메신저로 했어야 할 얘기들을 MSG섞어가며 떠드니 오해는 풀린지 오래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아직 나 화났어. 입을 꾹 다물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데 뭐가 그렇게 좋은건지. 할 말이 많은 와중에도 뾰로통한 입술을 쪽쪽거리고 괜히 잘 넘어간 머리를 쓰다듬고 밀어내는 팔을 다시 감아온다. 그래도 팔을 걷어내고 아예 팔짱을 껴 버리자 룸메는 옆에 눕더니 커다란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마주본다.
“사실은 시험 끝나고 잠시 교외에 갔다 왔어.”
“뒷풀이하러? 어차피 너네 과 동기들도 한 다리 건너 아는 애들인데 왜 연락 안 했어.”
“아니, 이거 계약하고 오느라.”
“이게 뭔데?”
언제 꺼내 둔 건지 바닥에서 주워든 종이를 건네주더니 휴대폰으로 내용을 비춰준다.
“원룸 임대차 계약서.. 너 방 얻었어?”
“으흠! 나 대회나가고 훈련하고 그러면 체육관에 있는 시간도 늘어나고 남들이랑 생활패턴이 달라서 기숙사 생활하기 힘들어. 너도 기숙사 좁고 더운데 계단 오르락내리락 하기힘들다고 불만 많았잖아. 기숙사는 다시 배정받으면 같은 방 못 쓸 수도 있는데 다른 애랑 자는 꼴은 못 보겠고..”
“야.. 무슨!”
구구절절 맞는 말이긴 한데 말이 좀 그렇다. 그러니까 우리 짐승새끼가 말하고 싶은 뜻은..
“그러니까 나랑 살래?”
동거하자는 거잖아. 깨닫기도 전에 두 볼이 확 달아올랐다. 아니, 누가 너랑 같이 살아준대? 물어보지도 않고 방부터 계약하면 어쩌자는 거야. 지 방에 내가 얹혀살고 그러면 좋아할까봐? CC끼리 하지 말라고 추천하는 베스트 5위에 들면서도 동시에 CC끼리 가장 하고 싶어하는 베스트 1위를 그렇게 제안하고 그러면. 어? 그러면..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면 나보고 어떡하라고. 들뜨면서도 복잡해진 머리에 괜히 네 볼만 만지작 거린다.
“부담되면 그냥 짐 창고라고 생각하고 옮겨놔도 돼. 데이트 할 시간 없으면 그냥 얼굴 보고, 밥 한끼 같이 먹고, 손만 잡고 잘 수도 있으니까.”
“퍽이나.”
“그래. 사실 방금 한 말은 거짓말이야.”
그럴 줄 알았지. 퍽이나 니가 손만 잡고 자자고 하겠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말라고 했던 날. 칼을 갈던 리벤지는 짐승새끼의 순순한 협조 끝에 속옷만 남겨둔 위에 올라타 면으로 된 천조각과 조금은 거칠어진 피부 아래 숨겨진 근육들을 느긋하게 쓰다듬을 수 있었다. 상등품의 고기를 고르듯 부위에 따라 그 질감과 변화하는 형태를 하나하나 음미하며 쇄골부터 발가락 사이까지 빈틈없이 즐겼지.
“그래도 부담가지라고 한 말은 아니야. 아니다, 부담 가져. 나는 네가 다른 년이랑 자는 꼴 못 봐.”
“아니,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른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바람피고 그러면 누가 너 쉴드 쳐 줄줄 알아? 공개적으로 망신 줄 거야. 신방과 18학번 퀸카 내 여친이랑 바람핀 새끼 나와!”
“미친년아! 지금 10시 넘었어. 조용히 안 해?”
“그러니까 나랑 살자 그냥.”
짐승새끼의 가죽처럼 두꺼워진 굳은 살과 그 사이 미처 여물지 못한 여린 살에 여자라면 누구라도 부끄럽지 않아 할 수 없는 민감한 부위들까지 관찰했다. 그 위에서 춤을 추던 손가락이 마침내 너와 연결되는 순간. 느긋한 전희가 이어지는 동안 몰이를 당하는 토끼처럼 덜덜 떨던 짐승새끼가 이성을 잃고 여우처럼 요염하게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며 앙앙거리던 모습을 떠올리니 괜히 손목이 시큰해졌다.
“나 아니면 누가 너 챙겨주겠어.”
“어?”
욕망에 눈이 멀어 가볍게 시작한 관계는
“살자고. 너랑 나랑.”
아무래도 코를 단단히 꿰인 것 같다.
“그런데 상자에 샤워기 헤드는 왜 넣었냐?”
기숙사라는 보금자리를 벗어나기로 한 지금.
“아, 그게.. 만약에 나랑 안 산다 그러면 너 밤에 외로울까봐.”
“같이 산다는 말 취소야”
“아니! 무슨 사람이 그렇게 가볍냐? 그럴수록 나랑 살아야지!”
"됐거든!"
우리집에는 웬수같은 짐승새끼가 산다.
[기숙사에는 머리검은짐승이 산다 외전. 우리집에는 웬수같은 짐승새끼가 산다. -끝-]